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르주 르메트르 (문단 편집) == 생애 == [[벨기에]] [[샤를루아]]에서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자 성공한 직물공 아버지를 둔 가정에서 4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예수회가 운영하는 칼리지 졸업 이후 [[뢰번 가톨릭 대학교]]에 [[토목공학]] 전공으로 1911년 17세의 나이에 입학하였다. 하지만 곧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고, 조르주 르메트르도 1914년 동생 자끄 르메트르와 함께 '''자진 입대'''하여 벨기에군 포병 상사로 복무, 안트베르펀 방어전과 이제르 강 전투 등에 참전하여 벨기에 십자 무공 훈장까지 수훈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에 상사로 복무 중 이프르 전투에서 혹독한 참호전과 독일군의 독가스 살포를 겪고 전쟁 중 목격한 인간의 고통과 잔혹한 세태를 보며 자신의 신앙을 다시 굳게 되돌아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미 입대 이전부터 종교 생활을 하고 싶었지만 사제의 길에 헌신을 할 것인지, 또 예수회 수도 사제가 될지 교구 사제가 될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고 결국 교구 사제가 되기로 결심한다. 전쟁 중 친구 요리스 반 세베렌에게 1916년에 보낸 편지에 따르면 그는 자신이 종교에 더 헌신해야 한다는 부름을 받았다고 설명한다. 또한 과학에 대한 관심도 절대 놓치 않아서 참호전 중에도 휴식할 기회만 있으면 [[앙리 푸앵카레]]의 수학 및 물리 서적을 틈틈이 탐독하였다. 이 와중에 순수과학에 대한 관심이 생겨 전후 전공을 [[물리학]]과 [[수학]]으로 바꾸어 졸업한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세계 대전 때 다짐한 바와 같이 교구 사제 과정에 진학하여 1923년 어린 시절 다녔던 예수회가 아닌 교구 사제가 되었다. 물리학/수학 학사 학위 취득 및 가톨릭 사제가 된 이후 조르주 르메트르는 본격적으로 연구를 하기 위해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입학, 당 대학 천문학 교수였던 [[아서 스탠리 에딩턴]]의 연구 조교로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한다. 이 시기부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천문학에 적용하려고 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MIT]] 박사과정에 진학하여 [[할로 섀플리]]지도 하에 학위를 마친다. 일련의 과정에서 아인슈타인의 장 방정식을 천문학에 적용할 아이디어와, 우주가 팽창한다는 실질적인 증거들을 확신하게 된다(은하간의 거리 등). [[벨기에]]의 [[뢰번 가톨릭 대학교]]에서 [[천체물리학]]을 가르치던 르메트르는 1927년 즈음 [[아인슈타인]]의 장 방정식의 해(다양체의 계량)에 대한 연구를 통해 우주의 팽창이 수학적으로 가능함을 보였고, 허블의 법칙을 유도했다. ([[소련]]의 [[알렉산드르 프리드만]]도 비슷한 시기에 독립적으로 오늘날 르메트르-프리드만-로버트슨-워커 계량으로 알려진 해를 연구했다.) 관측을 통해 팽창의 증거를 실제로 확인하고 허블 상수를 계산한 것이 2년 뒤의 허블이며, 후에 르메트르는 이를 발전시켜 [[빅뱅 이론]] (더 나아가 우주의 가속 팽창(!))을 제안한다. [[조지 가모프]] 역시 비슷한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르메트르의 회상에 따르면, 허블의 관측 전 열린 학회에서 아인슈타인을 만나 이야기했을 때 그는 "수학적으로는 가능하나, 물리적으로 옳지 않다고 말했다"고 하는데, 프리드만이 비슷한 계량을 얻었다는 소식도 르메트르에게 알려주었다. 그러나 허블의 발견이 알려진 후에 아인슈타인은 르메트르의 결과를 공개적으로 인정했고, 에딩턴과 함께 미국에 그의 연구가 알려지도록 힘썼다. 그러나 당시 우주론의 주류는 [[정적 우주론]]이었고, 그가 주창한 빅뱅 이론이 [[창세기]]의 [[천지창조]] 곧 ‘[[빛이 있으라]]’를 연상케 하는데다 하필 르메트르가 가톨릭 사제였기에, 빅뱅 우주론은 당시 과학계의 심정적 저항을 크게 받았다.[* 당시 주류였던 [[정적 우주론]]은 "[[우주]]는 예전부터 그 상대 그대로 변함없이 그대로일 것"이라는 이론이기 때문에, 우주가 시작되었다는 개념은 창조론자들만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현대의 편견과는 반대로 "우주가 만들어진 시점이 있다"는 이론인 빅뱅은 사람들에게 [[성경]]의 [[천지창조]]를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우주의 팽창이 발견된 이후에도 우주에 '시작'이 있다는 생각이 탐탁찮았던 일부 학자들은, 대안으로 [[정상우주론]]을 주장하게 된다.] 이에 르메트르는 [[성직자]]였지만 "과학으로서의 우주론과 신앙으로서의 창조는 전혀 연관이 없으니 선입견을 갖지 말아 달라"고 과학계를 설득했고, [[교황]] [[비오 12세]]가 자신을 밀어주는 것도 난감해 하면서 "빅뱅 우주론과 신앙을 연관짓지 말아달라"고 [[교황청]]에 요청하기도 했다. 그러던 와중 허블이 우주팽창의 발견으로 일약 스타로 떠오르게 되었고, 르메트르의 논문[* 참고로 그의 논문은 <일정한 질량을 갖지만 팽창하는 균등한 우주를 통한 [[우리은하]] 밖의 성운들의 시선 속도의 설명([[불어]] 원문:Un Univers homogène de masse constante et de rayon croissant rendant compte de la vitesse radiale des nébuleuses extragalactiques)>이라는 상당히 아스트랄한 제목을 가지고 있다.]도 1931년에 영어로 번역됐다. 그런데 르메트르는 이 논문을 [[영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우주 팽창과 관련된 부분을 '''빠트렸다'''. 여기에 대해서는 르메트르가 논문 편집자에게 보낸 코멘트가 있는데, 허블 법칙과 관련된 부분은 본인이 생각하기에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 번역하지 않았다는 것. 영어 번역본은 '허블이 이미 인기 스타가 된 뒤인 1931년에 나왔기 때문에 이미 널리 밝혀진 사실을 다시 쓸 필요가 없다'고 본인이 판단했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과학적 발견을 하는 데 첫 번째 발견자가 누구인지에 대해 [[대인배|그다지 집착하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그의 발견은 비교적 덜 알려진 채, 허블만이 영예를 누리게 되었다. 이러한 뒷사정으로 인해 현대에도 몇몇 학자들은 "허블 법칙을 [[허블-르메트르 법칙]]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고, 실제로 2018년 10월 26일 [[국제천문연맹]](IAU)은 모든 회원들의 [[https://www.iau.org/news/pressreleases/detail/iau1812/|전자 투표 결과]] 78%의 찬성을 얻어 허블의 법칙을 '[[허블-르메트르 법칙]]'으로 바꿔 부르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그냥 씹고 '허블의 법칙'이라고 계속 부르고 있다. [[명왕성]] 퇴출 이후 미국은 국제천문연맹과 사이가 좋지 않다.] 르메트르는 후에 [[교황청]] 과학원장까지 역임하였으며, 1960년에는 [[요한 23세]] 교황에게 [[몬시뇰]] 칭호까지 받는다. 20세기의 [[가톨릭교회]]가 [[자연과학]]계를 대하는 태도가 상당히 전향적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 >La science est belle, elle mérite d’être aimée pour elle-même puisqu’elle est un reflet de la pensée créatrice de Dieu. > ---- >과학은 아름답습니다. 과학은 하느님의 창조적인 생각을 반영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 사랑받을 가치가 있습니다. > ---- > 조르주 르메트르의 평소 생각이자 장례식 문구 중 일부[[https://archives.uclouvain.be/exhibits/show/georges-lemaitre/commencement-ou-creation/grande-guerre-concordisme-mode|#]][[https://stories.kuleuven.be/nl/verhalen/georges-lemaitre-tussen-god-en-de-sterren|#]]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